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

뉴욕타임스 윤여정 인터뷰 번역: 연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반응형

뉴욕타임스 2021년 오스카 특집 기사 (수상 전 노미네이트 관련 기사입니다) 

 

윤여정

 

https://www.nytimes.com/2021/04/02/movies/yuh-jung-youn-minari.html

 

She Never Dreamed of Acting. Now She’s an Oscar Nominee for ‘Minari.’

The veteran Korean star Yuh-Jung Youn has had a thriving career for five decades — all because of a choice she made when she failed her college entrance exam.

www.nytimes.com

 

 

연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의 베테랑 배우 윤여정은 50년 동안 승승장구해왔다. 이 모든 건 그녀가 대학 입학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내린 결정 덕분이었다.

 

6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한국의 베테랑 배우 윤여정은 다짐을 하나 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하고만 작업하겠다고 말이다. 만일 모험이 실패하더라도,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사적으로고마워하는 한 결과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수십 년 동안의 한정적인 선택과 직업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노년에 세운 그 철학은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반자전적 이야기로서 아칸소 주(Arkansas)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한국인 가족 이야기, ‘미나리’라는 영화를 윤여정에게 안겨주었다. 정이 넘치는 그 이민자 드라마에서 할머니 '순자’를 달콤쌉싸름하게 연기함으로써 윤여정은 한국인 여배우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73살의 아시아 여성인 제가 오스카 상 후보에 오른다는 건 절대로 꿈꾸지도 못한 일입니다.” 윤여정은 서울에 있는 자택에서 찍은 영상에서 그렇게 말했다. “미나리가 제게 너무도 큰 선물을 주었네요.”

이러한 승리와 그에 앞섰던 수많은 난관들을 이야기하며, 수심에 찬 표정은 곧잘 상냥한 미소로, 해맑은 웃음소리로까지 바뀌곤 했다. 차분한 검정색 상의에 긴 목걸이를 걸친, 윤여정의 조용한 모습에는 힘들이지 않은 기품이 서려 있었다. 때때로 몇 가지 영어 단어들이 좀 더 정확하게 요점을 짚어내도록 하기 위해서 윤여정은 카메라 밖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동 주연을 맡은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도 놀라움을 표했다. “때가 되었구나! 라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기생충’의 흥행이 (한국 연기자들이 보다 인정받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어요.” 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영어 외의 언어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최고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으로서, 이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윤여정의 오스카 행(行)에 기여했다고 본 것이다.

후보 지명 소식을 들었던 건 마침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British Columbia)의 밴쿠버에서 새로운 프로젝트인 “파친코”라는 제목의 애플TV 드라마를 촬영하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 처음에는 무감각했었다. 그러다 한국 언론들이 그녀의 수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스트레스죠. 사람들이 저를 축구선수나 올림픽 출전선수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 압박감이 저를 꽤나 힘들게 합니다.” 봉준호의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수상하길 바라고 있어요. 봉 감독님에게는 ‘다 당신 때문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봉 감독은 윤여정이 처음으로 영화에 데뷔했던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작품 “불의 여인”이란 작품의 팬인데, 그는 코로나 기간 동안 ‘어워드 시즌(awards-season)’을 겪는 것을 부러워했다. "감독님이 말하기를, 그냥 앉아서 Zoom 영상 통화로 해결하면 되니까 운이 좋다고 했어요. 미국에서는 시상식들이 경주를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사방으로 돌아다녀야만 하니까요. 나는 경주라는 건 말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힘차게 밀어부쳤다. 윤여정은 일요일에 미국 영화배우조합 어워드(SAG Awards)에, 그녀의 연기 및 ‘미나리’ 앙상블의 일원으로 후보에 올랐다. 또한 이달 말에 열리는 독립영화 스피릿 어워드(Independent Spirit Award)에서도 물망에 올랐다. 윤여정은 이미 20여개 이상의 비평가 단체로부터도 상을 받았다.

50년 이상을 한국의 텔레비전과 영화에 출연한 경력(최근 방영한 '윤식당’이라는 리얼리티 요리 프로그램, 게스트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논픽션 시리즈인 ‘윤스테이’를 포함해서)이 있으니, 그런 상들은 뒤늦게 돌아온 기회인 셈이다.

“당황스러웠습니다.”라고 윤여정은 말했다. “대부분 연기자들은 영화를 사랑하거나, 영화관하고 사랑에 빠지거든요. 내 경우엔 그냥 사고였어요.”

60년대 초반, 윤여정이 십대였던 시절에, 어린이 놀이 프로그램의 MC가 방송국 구경을 온 그녀를 발견하고 방청객들에게 선물을 나눠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 후에 수표를 받았는데 꽤 액수가 컸어요.” 비슷한 일이 뒤따랐다. 감독이 드라마 오디션을 제안해왔다. 망설이긴 했지만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대학 입학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녀의 모친이 꽤나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윤여정은 말했다. (이 기사가 온라인에 게재되고 나서, 윤여정측 대리인은 그녀가 시험은 통과했지만 점수가 낮아서 명문 대학을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나는 연기가 뭔지 모릅니다.” 윤여정이 말했다. “대사를 외우려고 애썼고, 요청하는 게 뭐든 그대로 하려고 했어요. 그 당시 그걸 즐겼는지 싫어했는지 모르겠네요.”

70년대 중반 정상에 올랐을 무렵, 윤여정은 결혼을 하게 됐고 남편이 대학에 다니게 되어 미국 플로리다 주로 이민을 왔다. 거의 10년 동안 미국 태생의 두 아이를 기르며 가정 주부로 살아왔지만,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싱글맘이 되어 있었다. 윤여정의 명성은 사라져버렸고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성적 차별이 가혹한 처벌이 되어 그녀의 경력을 물 경력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이 ‘저 여자 이혼녀야.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돼.’ 라고 말했었죠.”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절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엄청 이상한 일이죠. 뭐 그게 인간이지만요.”

두 아들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윤여정은 거의 가리는 것 없이 배역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예순을 맞이해서, 더 이상 가족들을 재정적으로 부양하지 않아도 되니,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것저것 요구사항이 많아서 때로 그녀를 좌절시키게 만드는 영화감독 홍상수라든지, 그녀 나이 또래의 여배우에게는 전례가 없던 배역으로 캐스팅을 하는 임상수 감독 말이다. 2013년작인 ‘돈의 맛’에서 윤여정은 연하의 남성 비서를 성추행하는, 권력자 여인을 연기해냈다.

윤여정의 절친한 친구인 이인화 PD가,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미나리’의 감독인 정이삭 감독에게 소개해줬다. 정 감독은, 봉준호 감독처럼 “불의 여인”에 나온 윤여정을 좋아했다. 그러한 사실 내지는 그(역주: 문맥상 her이 아닌 his, 감독의 초기작으로 추정됨)의 초기작들이 윤여정의 마음을 움직였다. 감독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졌다. “그랬던 데 대해서 지금은 모두가 저를 놀립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정이삭 감독에게 홀딱 빠졌는데, 감독님이 아주 조용한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내 아들 삼고 싶어요.” 

정 감독이 메일을 통해서 말하길 “(모든 영화에 있어서) 윤여정은 놀랍거나 예상치 못한 일을 합니다. 나는 그녀 자신의 삶과,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이 내가 써내려간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감독은 덧붙여서, 한국에서는 이 여배우가 통이 크고 헛소리를 싫어하는 배우로 유명하다고 말했다. 감독은 바로 그러한 자질을 ‘미나리’에서의 역할에 가져옴으로써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더 네이션 지(紙)에 기고한 글에서, 평론가 크리스틴 윤수 킴은 “윤여정이 스포트라이트를 훔쳤다. 비록 캐리커처 풍으로 기울긴 했지만 그녀가 연기한 순자는, 그러지 않았다면 음침한 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지고 말았을 극에다 절실히 필요한 유머와 활력을 불어넣었다.”라고 평했다. (김 씨의 평론은 뉴욕타임스에서도 볼 수 있다)

윤여정은 대본을 읽으며,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체험한 위협들 및 단 하나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공감했다. “어쩌면 내 두 아들을 위해서 영화를 찍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애들의 감정을 아니까요.” 윤여정은 말했다.

정이삭 감독은 윤여정이 ‘정 감독의 할머니를 흉내 내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그건 자신의 목표가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배우를 설득시켰다. 윤여정은 대본에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 창조에 있어서 자유를 갖는 데 가치를 뒀다. 그러나 이는 윤여정이 소중히 여기는 정 감독의 동정어린 접근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윤여정은 오클라호마 주 툴사의 열기 속에서 ‘미나리’를 촬영하던 혼란스러운 첫날을 회상했다. 정 감독은 배우가 고통받고 있음을 알아보았다고, 윤여정은 회상했다. “그가 가진 존경심과 염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윤여정은 자신의 손자 역할을 맡은 초짜 어린이 배우인 앨런 킴(Alan S. Kim)과 함께 연기하는 많은 장면들이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리라고 생각했음을 시인했다. “나는 이거 끔찍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어요. 얘를 데리고 어떻게 해야 될까? 하고요.” 그러나 소년이 자기 대사를 외우고 있음을 알게 되자, 염려는 사라졌다. 앨런의 직업 윤리는 그녀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었다.

열심히 준비하는 건 윤여정의 과거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언제나 윤여정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연극영화과를 간 것도 아니고 영화를 전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는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대본을 받으면 아주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윤여정은 할리우드의 앞으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윤여정은 종종 인터뷰 중에 생각하고 있는 걸 말로 할 때 직설적이 되는 점에 대해 자주 사과하면서, 영어가 유창하지 못하다는 점이 자신을 방해하고 있음에 두려워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깨달을 시간이 주어질 때, 그녀는 기꺼이 애썼다. 

“생각해보니, 모두 그럴 가치가 있었습니다.” 윤여정은 말했다. “작은 역할만 맡고, 사람들이 대부분 나를 싫어한다는 것에 고통을 받던 시절에 말입니다. 저는 그냥 연기를 관두거나, 미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윤여정은 살아남았다. “저는 아직 살아있고 마침내 연기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반응형